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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fe in Australia

한국전쟁 6.25와 세대를 뛰어넘는 교감

by thegrace 2020. 6. 21.

202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역사 70주년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6월 25일은 제게 그렇게 마음 깊이 다가오는 날은 아니었습니다. 겪어 본 적이 없는 역사는 저에겐 그냥 하나의 오래전 이야기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얼마 전 아이가 학교에서 내준 영어 과제(Assignments)에 대해 제게 상의를 해왔습니다. 영어 글쓰기 과제는 semester 1의 학교 성적(school report)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좋은 소재를 찾아 잘 쓰고 싶다고 하더군요.

출처: 국가 기록원. 왼쪽은 UN 참전 국가, 오른쪽은 UN군 참전기념 우표 (호주)


Biographical Writing Task

전기 쓰기 작업


과제는, 가족 중 어느 누구든지, 본인도 좋고, 한 명을 선정하여 그 사람에 대한 자서전 형식의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영어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몇 년 전 선배가 썼다던 좋은 예시라며 보여준 글이 있었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증조할머니가 2차 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실제 경험과 유태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쓴 글이었다고 합니다.

 

수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세계전쟁에 관심이 많던 아이를 데리고 군사분계선(휴전선 DMZ, demilitarized zone)을 갔었습니다. 외국인 여행자들을 상대로 하는 전문 여행사를 통해 Day Tour를 예약해서 방문한 DMZ은 아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었습니다. 딸아이는 그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의 증조할아버지인 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하더군요. 다행히 오래전 제가 얘기해 주었던 할아버지의 한국 전쟁 경험담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었던 전쟁의 이야기와 제가 자라온 이야기도 함께 해 주었습니다. 아이는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 글쓰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어제 받아온 점수는 만점이었습니다. 글쓰기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글을 쓰는 것에 막힘이 없고 제법 잘 쓰는 아이라 항상 좋은 점수를 받아 오는 편입니다. 그런데 유독 아이가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여서 물어보니, 선생님이 자신의 글을 돌려주며, 'It's my treasure!' 라며 칭찬을 많이 해 주셔서 무척 기뻤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니, 다른 어떤 글 보다도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걸 인정받았다는 게 좋았던 거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글을 읽어 본 저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글 속에 제 할아버지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자신의 증조할아버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His squadron moved swiftly through the forest, the sound of their heartbeats being the only thing they could hear. Every once in a while, a loud bang would echo through the trees. One more down. The urge to sleep was overpowering, but the thought of being found and killed was stronger. He jogged as hard as he could, the rain running down his face like the tears he could not cry. He stepped onto the edge of the rock face he was running along and cried out as he began sliding down it. His feet hit the bottom hard and he blacked out.
그의 중대는 숲 속으로 빠르게 움직였고, 자신들의 심장 박동 소리는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였다. 가끔씩, 엄청난 굉음이 나무를 통해 울려퍼지고 있었다. 하나 더. 잠이 쏟아지는 충동은 압도적이었으나, 발견되고 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그는 최선을 다해 뛰었고, 빗물은 그의 울지 못하는 얼굴을 눈물과 같이 적시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바위의 가장자리를 밟아 넘어졌고, 그의 몸은 한없이 어디론가 미끄러져 갔다. 그의 발은 바닥에 강하게 내리 꽂혔고 그는 정신을 잃었다.

아이가 쓴 글의 시작 부분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태어난 년도와 장소, 가정환경, 그의 어린 시절을 소개하며 일본이 한국을 30년을 넘게 지배하며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나라가, 해방과 동시에 미쳐 회복되기도 전에 일어난 1950년 한국 전쟁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가족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고 싶은 꿈을 키워가던 19세의 젊은 청년은 전쟁과 동시에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가족 모두를 전쟁으로 인해 잃고, 홀로 어렵게 살아 남아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개척하고 대가족도 이룹니다. 너무나 외로운 삶이 싫어, 대가족을 이루고 좋은 집과 좋은 차를 갖게 되며 넉넉한 삶 속에 자신의 열매를 무럭무럭 키워 나갑니다. 

 

아이의 글을 보니, 지도를 찾아 할아버지의 고향과 제가 자라온 곳 그리고, 전쟁 당시 군인의 모습, 할아버지의 사무실 책상 위에서 찍은 제 아기 때 사진 그리고 온 가족이 피크닉을 가서 함께 찍었던 단란한 한때를 사이사이 집어넣어 모든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이해되게끔 잘 배치를 해 두었더군요.

 

어릴 때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나 제가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제 할아버지 덕분이었습니다. 전쟁을 겪은 어려운 세대였지만, 자수성가하셔서 어느 정도 부를 이루셨을 때 얻은 첫 손녀인 저를 귀하게 여겨 주셨습니다. 글을 읽으며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항상 제게 잘한다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제 모든 상장을 벽에 붙이며 자랑스러워하셨으며 할아버지가 아끼시는 고가의 분재를 허락도 없이 학교에 가져가 죽였을 때도 혼내지도 않던 그분은, 제게는 한없이 너그러웠던 분이셨습니다. 제가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을 때, 평생 믿지도 않던 신에게 정화수를 떠 놓고 달밤에 빌던, 새벽녘 우연히 보았던 그 모습을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그를 외롭게 했고, 평생 트라우마 속에 살게 했습니다. 결국엔 기억을 잃어버리는 병에 걸리셨지만, 일한다고 바쁘다는 제가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뵙게 되면 그는 언제나처럼 제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맞아 주었었습니다. 

My great-grandfather would always tell my mother to "Believe in yourself and do your best." That is still something I live up to today, and I am honoured to have such an extrodinary, preseverant great-grandfather.
증조 할아버지는 항상 어머니에게 " 자신을 믿고 최선을 다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또한 내가 살아가는데 중요한 부분이 되고있고, 시대에 현존했던 굉장한 증조할아버지를 둔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다섯 장 분량의 글에 깊이 빠져들어 단숨에 읽으며 아이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의 방으로 건너가 안아주며 이렇게 좋은 기록을 남겨 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이도 자신의 뿌리가 자랑스럽다고 하더군요.

 

이곳에서 태어나, 영어를 모국어로 받아들이고, 저와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자라는 아이이지만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게 된 좋은 계기였던 거 같아서 저희 부부는 너무 뿌듯했습니다. 이번 과제는 단지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이 전부가 아닌 아이에게 평생 기억될 깊은 의미가 된 거 같습니다.

 

마지막 다른 한 장을 가득 채운 글의 '반영(reflection)' 부분은 말라라 요 사프 자이(Malala Yousafzai)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Malala Yousafzai : 파키스탄 사람인 그녀는 여성 교육에 관한 활동가이자 최연소 노벨 수상자입니다. 그녀는 여성의 평등교육을 위해 운동가로 활동하던 중, 불과 14세였던 2012년, 탈레반의 총에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멈추지 않은 여성의 인권 평등을 위한 운동을 인정받아 그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한 것입니다.

출처: wikidepia

말라라의 유명한 책인 'We are Displaced'에서 소개된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의 일 부분이 자신의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산중에서 낙오자가 되어 며칠을 굶고 헤매다 우연히 발견한 산딸기 밭에서 미친 듯이 배를 채운 뒤, 정신이 들어 둘러본 그 언덕은 죽은 수많은 시체들로 덮여있었습니다. 자신이 먹은 산딸기는 그들의 영양분을 먹으며 자란 것이란 걸 깨달은 순간, 쓴 물까지 모두 토해내고 탈진 상태가 되어 눈물도 말라버려 나오지 않는 서러운 통곡을 한 부분을 떠올린 것입니다. 

 

말라라의 책에서 소개된 그녀의 처절한 삶과, 증조할아버지의 절망적인 전쟁 속에서의 살기 위한 몸부림, 그리고 끝내 자신을 일으키고 강인하게 삶을 이어가는 그들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는 말을 언급했습니다.

 

선생님이 주신 코멘트의 일 부분입니다.

"... A truly inspiring story. The personal connection is clear and strong. Beautifully written..... excellent work..."


오른쪽 사진은 군사 분계선(DMZ, 휴전선) 입니다.

저번 한국 방문은 제 아이에게는 언제 다시 하게 될지 모르는 마지막 같은 여행이었습니다. 한국을 여러 번 가 보았음에도 음식, 문화, 언어... 모든 게 맞지 않아 매번 고생을 했기에 한국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이가 더 자라면 더욱 한국을 찾아가기가 힘들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제가 반 강제적으로 추진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아이가 잘 먹지를 못하고 여러 가지로 힘든 시간을 보냈었지만, 다행히도 DMZ을 방문했던 것만은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버스 안에는 전 세계에서 왔던 각기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의 현실을 직접 보고, 느껴 보고자 함께 했었습니다. 한국인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유일하게 저희가 전부였고 어린아이도 제 아이가 한 명뿐이었습니다. 

 

한참을 논길을 따라 달릴 때 보았던 평화로운 들판과 날아다니는 수많은 학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잠시 후 도착한 군사 분계선 출입문이 가까워 오자 헌병들의 근엄한 표정으로 인해, 순간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게 잘한 일인가 라는 걱정이 들 정도였습니다. 헌병은 친절했고 여권을 검사하는 그의 모습을 아이는 굉장히 신기하게 쳐다보았습니다. 호주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과 느끼기 힘든 분위기였기 때문에 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이 관광을 예약하고 나서, 아이에게 한국 전쟁에 대한 글을 찾아 읽어 보도록 했었습니다. 약 10 장 정도의 정보를 찾아 복사해 서 전부 읽어 보고, 대화를 나눈 후에 갔던 상황이라, 아이는 이미 한국에서는 모든 남성들이 국방의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고, 그 헌병도 평범한 청년임을 알았기에 두려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의 모습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고 버스는 잠시 후 문을 통과하여 북한과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남한과 북한은 각각 2km 반경, 총 4 km의 거리를 두고 분단되어 있습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쪽 마을은 매우 가까웠고, 커다란 북한의 깃발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이는 망원경으로 열심히 북한 땅을 바라보고, 근처에 있는 헌병과 사진도 찍고, 기념품 가게에서 한국과 유엔의 배지도 구입을 했습니다.

 

콘크리트 벽으로 막아놓은 땅굴을 기차를 이용하지 않고 아이의 요구대로 걸어내려갔다가 올라와야 했습니다. 몸을 낮추어야만 걸을 수 있는 그 길을 걸으며 인생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의 20년도 전에 수학여행을 와 봤던 그곳을 해외에 살다 제 아이와 다시 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콘크리트 벽을 확인하고 다시 지상으로 나왔을 때는, 매우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땀이 젖고 숨이 차올라왔지만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이는 영어로 가이드를 하신 분에게 궁금한 점도 질문하고, 마침 앞에 앉아있던 미국의 어느 신문사에서 왔다는 사람과 대화도 나누며 그날 하루를 뜻깊게 보냈습니다.

 

아이가 쓴 글을 읽으며, 그때 한국에서 DMZ을 찾았던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만 11 세 이상만 방문 가능하다는 판문점(borderline) 견학을 나이가 너무 어려 못 가본 것에 대해 아이는 지금도 불만을 제기합니다. 

 

언젠가 다시 한국을 가게 되면 그때는 판문점에서 좀 더 가까이 한국의 현실을 느낄 수 있길 바라봅니다. 


▶호주 일상

2020/06/13 - [호주 라이프 Life/호주 일상] - 티스토리의 This and That Australia by the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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