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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fe in Australia

고양이 셔벗의 다이어리 The Beginning

by thegrace 2020. 5. 21.

내가 이 가족들과 한 식구가 되고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실 *30초 땡 기억력을 가진 나는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생각나는 몇 가지를 기록해 볼까 한다. 모든 것들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에 대해 혹시 내 일기장을 보시는 분들께 먼저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30초 땡 기억력이란?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어도 30 초 안에 다 잊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의 기억력 회로다. 예를들어 설명을 드리자면, 엄마가 스낵을 미끼로 나를 잡아 뽀뽀를 사정없이 하신다. 난 싫어서 울어대고 엄마가 날 놓아주자마자 잽싸게 의자 밑으로 숨어 버린다. 그 후 30초도 안되어 스낵의 미끼에 난 또 잡히고 만다. 그게 나의 30초 땡 기억력이다. 난 이런 내가 싫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한다.

 


 

2016년 12월 3일

 

고양이가 가족을 만나는 법 - 명심해라! 기회는 올때 잡아야 한다.

 

내가 입양된 날이다. 센트럴 코스트에서 약 2시간 거리의 시드니로 여행을 한 탓에 여독이 풀리지 않아 잠을 자고 있었다.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얼굴을 내밀었더니 엄마와 함께온 듯한 어떤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나의 본능이 내게 말했다.

 

저들을 잡아라!

 

 


  

2016년 12월 4일

 

고양이가 이름을 기억하는 법

 

이름이 생겼다.

 

새 가족들은 나를 셔벗(Sherbet)이라 불렀다. 언니가 지어준 이름이다.

 

처음엔 그게 나를 부르는 소리인지 모르고 하던일을 계속했더니, 언니가 내 귓구멍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

 

난 귀가 정말 예민하다. 그런데 내귀를 붙잡고 셔벗이라 반복적으로 말하는 언니 때문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과거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바로 그날 까맣게 잊여 버렸다. 참, 고양이의 기억력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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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밤.

 

고양이 화장실 성공 스토리

 

난 새 집에서 첫 응가(전문 용어로는 ㄸ ㅗ ㅇ, 좀 있어보이는 말로는 빅 비즈니스, 영어로는 poo)를 성공시켰다. 

 

포티(Potty, 한국어로는 유아용 변기, 전문 용어로는 고양이 화장실, 은어로는 ㄸ ㅗ ㅇ    ㅌ ㅗ ㅇ)에 리터를 채우고, 하루 종일 왜 볼일을 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시던 아빠가 제일 기뻐하셨다.

 

그 뒤로 나의 뒷처리는 아빠 담당이 되었다.

 

내가 포티 쪽으로 가는가 싶으면 온 가족의 시선이 나에게 몰렸다. 그들은 못 본 척 연기하려 했지만, 난 속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과 온 신경은 나를 향해 있었고 도대체 왜 저러나 싶었다.

 

내가 리터들을 발로 정리하고, 자리를 딱 잡자 가족들은 일제히 나를 보며 신기한 듯 눈을 반짝였다. 언니가 어렸을 적 첫 포티 트레이닝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아빠와 엄마는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으리라 의심치 않는다. 볼일을 마치고, 예쁘게...예쁘게 나의 흔적들을 덮어 놓자 가족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참... 인간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난 마침내 이 집에 제대로 흔적을 남겼다. 이젠 확실히 이 집이 내 집이다.

 

 


 

2016년 12월 ? 일

 

고양이 옷은 실패, 하지만 사진은 남기다.

 

이래서 일기는 밀리면 안 된다. 날짜가 생각이 안 난다. 확실히 크리스마스 전이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엄마랑 언니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옷 두 벌을 사 오셨다. 한벌은 사이즈가 너무 작아 탈락. 다른 한벌은 내 옷인양 딱 맞았는데, 입은 순간 난 고장 난 장난감처럼 움직였다.

 

사실 옷을 입어본 건 태어나 처음이다. 언니랑 엄마랑 너무 좋아하는 거 같아서 입어 주긴 했는데,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다. 조금만 걸어도 옆으로 쓰러지고 만다. 그래서 나는 그냥 누워버렸다.

 

 

이유는 내 몸의 털들이 그냥 털코트가 아닌 균형 감지기 이기 때문이다. 몸에 난 털로 난 주변 환경을 섬세하게 감지하고 몸의 균형을 잡는데, 그걸 옷으로 덮어 버렸으니 내 몸이 내 맘대로 작동이 안 될 수밖에.

 

괜찮다. 이건 가족들도 나도 그전까지 크게 깨닫지 못했던 거니까.

 

옷은 실패다. 엄마는 바로 반납해 버리셨다. 다행히 옷의 택(tag)을 떼지 않았고 그 가게의 terms and condition(이용약관)을 어기지 않아 그대로 돈을 돌려받으실 수 있었단다.

 

사진은 남기고.

 


 

2016년 12월 24일

 

고양이 셔벗의 크리스마스 트리 사랑

 

크리스마스 이브다. 내 기록에 의하면 난 14개월 정도 된 고양이란다. 내 짧은 인생에 기억할 수 있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새 가족들과 맞이했다.

 

언니는 내 이름을 새긴 크리스마스 볼을 별 모양으로 만들어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아 주었다. 이럴 때 보면 참 괜찮은 인간인데, 먹을 거만큼은 나에게 너무 매정하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딱 본 순간 난 바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예뻐서? 아니다. 나무 아래에 서면 삐쭉삐쭉하게 나온 인조 나무 잎사귀는 나의 등을 시원하게 긁어 주었다.

 

이거 때문에 난 다음 크리스마스를 기대한다. 

 

 


 

2016년 12월 25일

 

고양이 셔벗의 크리스마스 캐롤

 

크리스마스 당일 점심, 우리 가족은 조촐한 크리스마스 점심을 함께 했다. 엄마는 우당탕탕 아침 내내 뭔가를 열심히 만들어 냈지만 나온 음식을 보니 대충 감이 온다.

 

요. 알. 못.이다.

 

잠시 후, 언니가 날 붙잡아 올리더니 머리에 뭔가를 씌우고 노래를 부르잔다. 

 

난 소리 질렀다. 제발 날 놓아 달라고. 하지만 가족들은 진짜 내가 노래를 부르는지 알고 더 시켰다. 난 그날 내 평생 가장 오랜 시간 소리를 지른 거 같다.

 

 


▶고양이 셔벗

2020/05/14 - [라이프 Life/호주 일상] - 고양이 다이어트 셔벗의 살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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